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그는 철학에서 다뤄온 그간의 여러 문제들,
즉 고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세와 근대에 속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뤄온 문제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문제로 느껴진 혼란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것이 철학의 해야 할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이 중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트락타투스 로지코-필로소피쿠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즉 논리철학 논거입니다.
그는 본래 이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펼쳤는데,
전통 철학에서는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세계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세계는 자연과학적 세계처럼 검증이 가능한 세계이고,
말할 수 없는 세계는 가치에 대한 것, 즉 비트겐슈타인이 신비한 것이라 불렀던 세계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저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제에
우리는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즉 모르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명제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보죠.
그리고 "테이블 위에 컵이 있다"라는 말과 비교해 보기로 하죠.
"테이블 위에 컵이 있다"라는 이런 명제는 검증을 통해서,
더 쉽게 말해서, 확인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컵이 있으면 컵이 있다고 하는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므로 진리가 되고,
컵이 없으면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라는 이런 명제들 또한 검증하여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자연과학적 명제들이 되지만,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애초에 감정의 어떤 당부 같은 성격의 것이지
검증 작업을 통해 진리 또는 거짓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가치명제에 대해서
사실 관계를 파악하듯이 그렇게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에 속한다는 것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마치 알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온갖 추정을 펼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한 후,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명시적으로 말했습니다.
전기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언어를 가지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지식을 얻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란 언어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됩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중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고,
세계의 사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언어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일상에서 언어를 사용할 때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간이 간다"와 "철수가 간다" 중에서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명제는 "시간이 간다"입니다.
이유는 철수가 물리적 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철수가 간다"는 명제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간다"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물질도 아니고
비물질로 단정짓기 어려운 미지의 개념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일상 언어로 이해한 것처럼 사용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문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마치 알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하며 탐구하는 이상한 태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언어를 잘 정리하여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면,
불필요한 문제들 즉, 문제가 아닌데 문제로 느껴진
혼란에 속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나 윤리학적인 문제들은
전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명료하게 하여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섣불리 인간이 알 수 있는 명제처럼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인간의 언어적 개념 표기를
명료하게 하는 기호 논리학적인 작업 등을 시도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명제그림 이론"을 간략히 살펴본 후,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즉 하나의 명제 속에는 이 세계에 대응하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명제는 의미를 가지는 명제가 됩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적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그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림이 세계의 사실을 묘사하듯이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명제 그림 이론"은 언어가 세계의 사실과 대응한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는 언어와 세계 사이에 유사한 구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언어를 통해 표현된 그림과 세계의 사실 사이에는 서로 유사한 구조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해당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즉, 명제가 세계를 반영하려면,
명제와 세계 사이에 공유되어야 할 논리적 형식이 필요합니다.
이 논리적 형식이란,
사태 안에서 대상들이 연결되는 명확한 방식, 즉 그 사태의 구조를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명제로 이 세계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제와 세계 사이의 공유되는 논리적 형식은,
그 사실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여러 요소들(그녀, 친구, 술)의 연결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 요소들을 연결하여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사실이 구성됩니다.
이때 나타나는 요소들이 연결되는 명확한 방식, 즉 그 사태의 구조가 바로 논리적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논리적 형식은 세계의 사실과 언어 사이에서 공유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를 반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논리적 형식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리적 형식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논리적 형식이 언어나 사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규칙이지만,
그 자체로는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철수 왼쪽에 영희가 있다"라는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논리적 형식도 잘 공유되고 있습니다.
철수, 왼쪽, 영희라는 세 요소가 이 명제를 구성하며,
이러한 명제와 세계 사이에서는 서로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명제 속에서의 세부적 요소들이 배열되는 문법적 규칙이나 배열 상태가
세계의 사실 속 배열 상태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로 인해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대응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설명은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려고 시도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완벽하게 세계의 사실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이 술잔에 담겨 있다고 가정하며 이해합니다.
그러나 명제 자체는 이러한 세부적인 사실을 명시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이는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완전히 포괄하거나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러한 부족한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채워 넣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우연에 의존하며,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나 부정확성이 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철수 왼쪽에 영희가 있다"라는 문장처럼,
언어와 세계 사이의 논리적 형식과 문법의 배열 규칙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우연적이며, 많은 경우에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 논의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무어(G.E. Moore)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인간이 사용하는 명제가 복합적인 사실들,
즉 여러 사실들이 연결된 복합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았으나,
이러한 복합 사실을 명제가 그 자체로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 사실의 일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뿐이며,
따라서 사실 전체를 완벽하게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이러한 관점을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명제가 논리적 형식을 직접 나타낼 수 없으며,
명제의 빛을 통해서만 논리적 형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세계의 사실을 언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여주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울인 언어는 세계의 완전한 반영이 아니라
선택적이고 부분적인 반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구성하는 논리적 형식을 어설프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연히 어떠한 문법적 구조가 아직 단순한 형태로라도
이 논리적 형식을 잘 비춰줄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일 뿐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형식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 명제와 함께 논리의 외부 어딘가에,
즉 세계의 바깥에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언어 안에 갇혀서는 어느 외부에 있는 세계와 공유하고 있는
논리적 형식을 결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적 형식이란 말할 수 없는 것,
침묵해야 하는 것에 속하지만,
이 침묵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바이며,
이 논리적 형식은 언어 속에서 스스로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인 피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논리처럼 논거의 주요 포인트가 "윤리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윤리, 종교, 미학 등 가치를 다루는 영역들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검증할 수 없기에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이런 것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 편지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가 중요하다고 했을까요?
앞서 우리는 논리적 형식이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명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의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합니다.
윤리학을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이나 거짓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
여전히 언어로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경향을 인간의 고귀한 성향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인간 삶에서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자연과학적 명제들이
인간이 직면하는 가치론적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논의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
즉 가치와 신비의 영역을 정확하게 위치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인간이 알고 말할 수 있는 세계만을 중시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홀히 여기려 했던 이전의 경향과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비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알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고,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전통 철학이 해내지 못한 명료함과 질서를 제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깊이 논하고 그 한계를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고자 했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그는 철학에서 다뤄온 그간의 여러 문제들,
즉 고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세와 근대에 속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뤄온 문제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문제로 느껴진 혼란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것이 철학의 해야 할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이 중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트락타투스 로지코-필로소피쿠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즉 논리철학 논거입니다.
그는 본래 이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펼쳤는데,
전통 철학에서는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세계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세계는 자연과학적 세계처럼 검증이 가능한 세계이고,
말할 수 없는 세계는 가치에 대한 것, 즉 비트겐슈타인이 신비한 것이라 불렀던 세계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저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제에
우리는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즉 모르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명제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보죠.
그리고 "테이블 위에 컵이 있다"라는 말과 비교해 보기로 하죠.
"테이블 위에 컵이 있다"라는 이런 명제는 검증을 통해서,
더 쉽게 말해서, 확인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컵이 있으면 컵이 있다고 하는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므로 진리가 되고,
컵이 없으면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라는 이런 명제들 또한 검증하여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자연과학적 명제들이 되지만,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애초에 감정의 어떤 당부 같은 성격의 것이지
검증 작업을 통해 진리 또는 거짓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가치명제에 대해서
사실 관계를 파악하듯이 그렇게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에 속한다는 것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마치 알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온갖 추정을 펼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한 후,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명시적으로 말했습니다.
전기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언어를 가지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지식을 얻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란 언어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됩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중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고,
세계의 사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언어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일상에서 언어를 사용할 때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간이 간다"와 "철수가 간다" 중에서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명제는 "시간이 간다"입니다.
이유는 철수가 물리적 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철수가 간다"는 명제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간다"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물질도 아니고
비물질로 단정짓기 어려운 미지의 개념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일상 언어로 이해한 것처럼 사용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문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마치 알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하며 탐구하는 이상한 태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언어를 잘 정리하여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면,
불필요한 문제들 즉, 문제가 아닌데 문제로 느껴진
혼란에 속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나 윤리학적인 문제들은
전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명료하게 하여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섣불리 인간이 알 수 있는 명제처럼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인간의 언어적 개념 표기를
명료하게 하는 기호 논리학적인 작업 등을 시도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명제그림 이론"을 간략히 살펴본 후,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즉 하나의 명제 속에는 이 세계에 대응하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명제는 의미를 가지는 명제가 됩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적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그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림이 세계의 사실을 묘사하듯이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명제 그림 이론"은 언어가 세계의 사실과 대응한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는 언어와 세계 사이에 유사한 구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언어를 통해 표현된 그림과 세계의 사실 사이에는 서로 유사한 구조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해당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즉, 명제가 세계를 반영하려면,
명제와 세계 사이에 공유되어야 할 논리적 형식이 필요합니다.
이 논리적 형식이란,
사태 안에서 대상들이 연결되는 명확한 방식, 즉 그 사태의 구조를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명제로 이 세계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제와 세계 사이의 공유되는 논리적 형식은,
그 사실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여러 요소들(그녀, 친구, 술)의 연결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 요소들을 연결하여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사실이 구성됩니다.
이때 나타나는 요소들이 연결되는 명확한 방식, 즉 그 사태의 구조가 바로 논리적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논리적 형식은 세계의 사실과 언어 사이에서 공유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를 반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논리적 형식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리적 형식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논리적 형식이 언어나 사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규칙이지만,
그 자체로는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철수 왼쪽에 영희가 있다"라는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논리적 형식도 잘 공유되고 있습니다.
철수, 왼쪽, 영희라는 세 요소가 이 명제를 구성하며,
이러한 명제와 세계 사이에서는 서로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명제 속에서의 세부적 요소들이 배열되는 문법적 규칙이나 배열 상태가
세계의 사실 속 배열 상태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로 인해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대응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설명은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려고 시도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완벽하게 세계의 사실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이 술잔에 담겨 있다고 가정하며 이해합니다.
그러나 명제 자체는 이러한 세부적인 사실을 명시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이는 언어가 세계의 사실을 완전히 포괄하거나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러한 부족한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채워 넣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우연에 의존하며,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나 부정확성이 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철수 왼쪽에 영희가 있다"라는 문장처럼,
언어와 세계 사이의 논리적 형식과 문법의 배열 규칙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우연적이며, 많은 경우에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 논의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무어(G.E. Moore)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인간이 사용하는 명제가 복합적인 사실들,
즉 여러 사실들이 연결된 복합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았으나,
이러한 복합 사실을 명제가 그 자체로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명제는 세계의 사실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 사실의 일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뿐이며,
따라서 사실 전체를 완벽하게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이러한 관점을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명제가 논리적 형식을 직접 나타낼 수 없으며,
명제의 빛을 통해서만 논리적 형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세계의 사실을 언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여주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울인 언어는 세계의 완전한 반영이 아니라
선택적이고 부분적인 반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구성하는 논리적 형식을 어설프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연히 어떠한 문법적 구조가 아직 단순한 형태로라도
이 논리적 형식을 잘 비춰줄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일 뿐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형식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 명제와 함께 논리의 외부 어딘가에,
즉 세계의 바깥에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언어 안에 갇혀서는 어느 외부에 있는 세계와 공유하고 있는
논리적 형식을 결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적 형식이란 말할 수 없는 것,
침묵해야 하는 것에 속하지만,
이 침묵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바이며,
이 논리적 형식은 언어 속에서 스스로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인 피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논리처럼 논거의 주요 포인트가 "윤리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윤리, 종교, 미학 등 가치를 다루는 영역들은 세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검증할 수 없기에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이런 것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 편지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가 중요하다고 했을까요?
앞서 우리는 논리적 형식이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명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의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합니다.
윤리학을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이나 거짓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
여전히 언어로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경향을 인간의 고귀한 성향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인간 삶에서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자연과학적 명제들이
인간이 직면하는 가치론적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논의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
즉 가치와 신비의 영역을 정확하게 위치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인간이 알고 말할 수 있는 세계만을 중시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홀히 여기려 했던 이전의 경향과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비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알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고,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전통 철학이 해내지 못한 명료함과 질서를 제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깊이 논하고 그 한계를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