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매주 주일마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합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지는 않지만,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저의 예술혼을 발휘하고 있어요.
최근에도 주일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이, 교회를 갔고 피아노 반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 주일학교 아이 2명이 피아노로 다가왔습니다. 1명은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였고, 다른 1명은 3살 된 제 아들이었어요.
3살인 제 아들은 성큼성큼 피아노로 걸어가더니 의자에 앉아서 아무 건반이나 누르고 피아노를 쳤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의미 없는 소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에게 “XX야, 너도 피아노 한번 쳐봐.”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피아노 못 쳐요. 피아노 학원 다니고 있는데 너무 어렵고 그래서 잘 못 쳐요.”
오잉?
3살인 제 아들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도, 피아노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냥 피아노에 가서 아무 건반이나 누르면서 몹시 즐거워했어요.
그런데, 피아노를 학원에서 배우고 있는 초3 아이는 스스로를 ‘피아노 못 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피아노를 거부하더라고요.
그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아, 어린아이일수록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단 해보는구나.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해보고 싶으면 해 보고, 아니면 마는구나.
누군가에게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묻지도 않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구나.
심지어 나는 왜 피아노를 잘 칠까, 또는 왜 못 칠까 라는 자아비판을 하지도 않는구나.
어린아이일수록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잘났다 못났다의 판단을 하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해보고 재미있으면 즐겁게 하고, 재미없으면 안 하는구나.
우리 모두는 태어났을 때, 그리고 어렸을 때에는, 이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았을 거예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사회화가 시작되고, 나와 타인을 분리하게 되고, 각종 교육을 받으면서 타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과 방식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로 인해 나를 스스로 돌아보고 평가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자기 객관화, 자아비판은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여 발전하게끔 만드는 귀한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내가 너무 스스로를 규정하고 한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인이 된 지금, 남들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 지나치게 스스로를 구속하고 부정적인 자기 대화(self talk)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철학자 니체는 인간 정신의 3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입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넙니다. 낙타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합니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하며, 복종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포효합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하게 되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타인이 강요하는 짐을 지는 낙타에서 스스로 질 수 있는 짐을 만들어내는 사자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입니다. 즉, 아이가 춤을 추며 놀이하듯 자신의 삶을 현존하며 기쁘게 살아내는 단계입니다.
저는 현재 낙타의 삶을 살고 있지만, 사자의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가끔은 어린아이의 단계로 사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계신가요?
더 많은 분들이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로 여기고 재미있게 만끽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매주 주일마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합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지는 않지만,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저의 예술혼을 발휘하고 있어요.
최근에도 주일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이, 교회를 갔고 피아노 반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 주일학교 아이 2명이 피아노로 다가왔습니다. 1명은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였고, 다른 1명은 3살 된 제 아들이었어요.
3살인 제 아들은 성큼성큼 피아노로 걸어가더니 의자에 앉아서 아무 건반이나 누르고 피아노를 쳤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의미 없는 소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에게 “XX야, 너도 피아노 한번 쳐봐.”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오잉?
3살인 제 아들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도, 피아노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냥 피아노에 가서 아무 건반이나 누르면서 몹시 즐거워했어요.
그런데, 피아노를 학원에서 배우고 있는 초3 아이는 스스로를 ‘피아노 못 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피아노를 거부하더라고요.
그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해보고 싶으면 해 보고, 아니면 마는구나.
누군가에게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묻지도 않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구나.
심지어 나는 왜 피아노를 잘 칠까, 또는 왜 못 칠까 라는 자아비판을 하지도 않는구나.
어린아이일수록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잘났다 못났다의 판단을 하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해보고 재미있으면 즐겁게 하고, 재미없으면 안 하는구나.
우리 모두는 태어났을 때, 그리고 어렸을 때에는, 이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았을 거예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사회화가 시작되고, 나와 타인을 분리하게 되고, 각종 교육을 받으면서 타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과 방식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로 인해 나를 스스로 돌아보고 평가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자기 객관화, 자아비판은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여 발전하게끔 만드는 귀한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내가 너무 스스로를 규정하고 한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인이 된 지금, 남들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 지나치게 스스로를 구속하고 부정적인 자기 대화(self talk)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철학자 니체는 인간 정신의 3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입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넙니다. 낙타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합니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하며, 복종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포효합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하게 되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타인이 강요하는 짐을 지는 낙타에서 스스로 질 수 있는 짐을 만들어내는 사자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입니다. 즉, 아이가 춤을 추며 놀이하듯 자신의 삶을 현존하며 기쁘게 살아내는 단계입니다.
저는 현재 낙타의 삶을 살고 있지만, 사자의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가끔은 어린아이의 단계로 사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계신가요?
더 많은 분들이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로 여기고 재미있게 만끽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